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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 버린 이승만, 돌아와서는 사죄 대신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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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청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1,772회 작성일 24-02-2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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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까지 밀렸던 미군과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렸다. 9월 28일에는 서울 광화문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9월 29일 김포비행장에는 맥아더와 이승만이 도착했다. 국회의사당에서 중앙청까지 시가행진에 참여한 이승만은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서울 시민들은 공산군 치하에서 빨갛게 물든, 사상이 불순할 가능성이 높은 의심스런 시민들이었다.  


거짓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은 서울 도착 후 시민들에게 엎드려 사죄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을 되찾은 뒤에 벌어진 일들은 부역자 처단 작업이었다. 친일 부역자 처단에는 그토록 우유부단했던 이승만 정권은 좌익 부역 혐의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9월 28일부터 강력한 부역자 검거 열풍이 불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심사를 맡았다. 각 시도 경찰국이 부역자에 대한 신고를 유도하는 등 부역자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다. 이런 부역자 검거 광풍은 곧바로 학살로 이어졌다. 학살은 불법이었고 그런 이유로 무자비했다. 부역 혐의자들은 억류 단계에서 이미 테러에 가까운 폭력적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군사적 상황과 수형 시설 부족을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신속히 집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제적 비난이 빗발치고 여론의 반발이 일어났다. 주미대사 무초가 나서서 이승만의 자중을 요청하는 등 진화에 나서야만 했다.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은 곤혹스런 일이었다.

 

1950년 12월 세계 언론은 유엔에 보고된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보도했다. 세계 언론들은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반(反)문명 행위로 고발했다. 이승만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돌발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는 독재자에 불과했다. 현재 북한 지도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다를 바 없었다.

 

유엔에 보고된 학살 사건은 당시 고양군 홍제리(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29여단 캠프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50년 12월 15일, 병사들이 포승줄에 묶인 재소자들을 트럭에서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렸다. 병사들은 마포 형무소 경비대 소속이었다. 39명의 재소자들 뒤에는 폭 1미터, 깊이 1.5미터의 구덩이가 4개 파여 있었다. 

 

경비병은 재소자를 구덩이에 밀어넣은 뒤 소총을 난사했다. 경비병 수가 적었던 탓에 그들은 구덩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총을 쏘아댔다. 묶인 남녀는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김준연 법무장관의 발표에 의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되었지만,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두 명이 있었다고 영국군은 증언했다. 아마도 사살된 어른들의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확인 사살까지 진행된 학살이 끝난 뒤, 경비병들은 흙으로 구덩이를 덮고 옆에 새로운 구덩이를 팠다. 다음 날의 학살을 위한 것이었다. 보다 못한 영국군은, 다음 날 아침 35명의 재소자를 데리고 온 마포 형무소 경비병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빈 구덩이를 메우게 했다. 이어 사건을 유엔에 보고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캐나다군 화이트(White) 대령을 파견해 사건조사를 맡겼다. 학살 현장 주변 발굴 조사에서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학살은 계속됐다. 마포 형무소는 홍제리 학살터로의 죄수 이송을 중단했지만, 이번에는 육군 헌병이 좌익 혐의를 덮어쓴 죄수들을 데려다 총살형을 집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육군의 사형집행은 주로 경의선이 놓여있는 수색 총살장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날 따라 홍제리 학살터가 선택되었다. 유엔 감시단의 시신 발굴 작업이 마무리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긴급 출동한 영국군이 살육을 중단시켰지만 58명의 사형 집행 대상자 중 이미 20명이 학살된 뒤였다. 영국군 장교가 통역을 구하느라 지체된 시간 동안 죽은 숫자였다. 영국군은 한국군의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해 잔인한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사형 집행 병사들은 구덩이에 무릎 꿇린 사람들의 뒤통수에 대고 총을 쏘았다. 법률적 심사와 판결에 의한 형 집행이 아니었다. 보복과 응징이라는 적대적 분노의 발산일 뿐이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IS(이슬람 국가)의 참수 행태와 다를 바 없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영국군 29여단장 브로디(T. Brodie) 준장은 자신의 주둔지에서 학살 사건이 재발한다면 한국군과 형무소 경비대에 대한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어서 학살 현장에 영국군 중대 병력을 배치해 더 이상의 살육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서울 시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대통령과 군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남쪽으로 갈 수 없다는 소문이 퍼져 그나마 뒤늦게 피난을 떠나려 했던 사람들도 주저앉았다. 극히 일부지만, 시민들에게 약속한 서울 사수 국회 결의를 지키겠다며 남은 반공 인사들도 있었다. 

 

이런 마당에 버리고 간 시민들 앞에 뒤늦게 나타난 정부는 사상의 순결을 증명하라고 다그침하고 있었다. 군과 경찰, 반공 청년 단체들이 총부리를 겨누며 적성분자들을 색출해 냈고 곳곳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사회적 지위와 계급적 위치, 육체적 능력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존재를 대상으로 도덕과 질서의 이름 아래 야만이 집행되었다. 명예살인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이 한국전쟁 시기에 벌어졌다. 북한에 점령되었다 남한이 되찾은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다. 국가적 차원의 명예살인은 힘없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자행됐다. 주인을 자처한 국가의 명령에 순진하게 따른 대가였다.

 

이승만에게 한국전쟁은 천금 같은 도움이 됐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이승만은 곧 정권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침공은 사면초가의 이승만을 살려놓았다. 전시비상계엄 상황에서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이승만에게, 전쟁은 한 줄기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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